문학의 숲 [호메르스의 대서사시:오디세이 연재] 고향을 찾아가는 인간의 영원한 항해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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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년, 마침내 일어서다
아테네의 한마디가 텔레마코스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던 용기를 깨웠다
오디세우스가 떠난 지 20년. 왕이 없는 이타케의 궁전은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구혼자들의 차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기다리기만 하던 텔레마코스는 자신의 무력함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멘테스의 모습으로 찾아온 여신 아테네는 그에게 더 이상 슬픔 속에 주저앉아 있지 말라고 일깨운다.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바다로 나가라.
그리고 자신의 집과 왕국을 스스로 지켜 내라.
그날, 한 소년의 가슴속에서 오디세우스의 아들다운 용기가 처음으로 눈을 떴다.
아테네의 한마디가 텔레마코스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던 용기를 깨웠다
▲ 아테네의 격려와 텔레마코스의 각성 ©Newsly |
“저에게 남은 것은 슬픔뿐입니다”
텔레마코스는 손님의 물음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시여, 사실 말씀드리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아버지가 이 집에 계실 때만 해도 우리 가문은 넉넉하고 평화로웠습니다.
이타케 사람들도 우리 집안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들의 뜻이 완전히 다른 쪽으로 기울어 버린 듯합니다.
신들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아버지만 흔적 없이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분이 전쟁터에서 돌아가셨다면 제가 이토록 끝없는 슬픔에 빠져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트로이 성벽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싸우다 돌아가셨거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의 품에서 숨을 거두셨다면 그리스 사람들이 아버지를 위한 무덤을 세웠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명예는 오래도록 전해졌을 것이며, 그 아들인 저에게도 자랑스러운 이름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폭풍과 파도가 아버지를 흔적도 없이 삼켜 버렸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지, 세상을 떠나셨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이름도 무덤도 없이 사라졌고, 저에게 남은 것은 슬픔과 기다림뿐입니다.”
텔레마코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아버지에 대한 슬픔보다 더 깊은 절망이 어려 있었다.
“더구나 신들은 제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조용히 슬퍼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실종에 더하여 또 다른 재앙을 제게 내렸기 때문입니다.
둘리키온과 사메, 숲이 우거진 자킨토스섬을 다스리는 유력자들,
그리고 바위 많은 이타케에서 권세를 누리는 자들이 모두 어머니와 결혼하겠다며 우리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들의 청혼을 받아들이지도, 단호히 물리치지도 못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혼자들은 그 틈을 타 날마다 우리 집에서 잔치를 벌입니다.
소와 양을 잡아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거리낌 없이 탕진합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우리 집의 재산을 모두 없애 버릴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아마 제 목숨마저 노릴 것입니다.”
“오디세우스가 돌아온다면 모두 대가를 치를 것이오”
텔레마코스의 말을 들은 아테네의 눈빛에 분노가 일었다.
“참으로 분통이 터지는 일이오.
지금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오디세우스요.
그가 돌아와 저 뻔뻔한 구혼자들 앞에 선다면, 모두 자신들이 저지른 짓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나는 오래전 오디세우스를 만난 적이 있소.
그때 그는 투구를 쓰고 방패와 두 자루의 창을 들고 있었소.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이었지.
오디세우스는 에피라에 사는 메르메로스의 아들 일로스를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소. 청동 화살촉에 바를 사람을 죽이는 독을 얻으려 했지만, 일로스는 신들의 노여움이 두려워 독을 내주지 않았소.
그러자 나의 아버지 안키알로스가 그 독을 나누어 주었소.
그는 오디세우스를 무척 아끼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때처럼 용맹한 오디세우스가 지금 이 궁전 문을 열고 들어와 구혼자들 앞에 선다고 생각해 보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던 결혼이 얼마나 쓰라린 결과를 가져오는지 깨닫게 될 것이오.
어느 누구도 그분의 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아테네는 잠시 말을 멈추고 텔레마코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올지는 신들의 뜻에 달려 있소.
이 집에서 구혼자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아직은 알 수 없소.
그러니 이제 그대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하오.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슬퍼할 때는 지났소.”
아테네가 가르쳐 준 길
아테네는 텔레마코스에게 한층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마음 깊이 새겨 두시오.
내일 아침, 이타케의 모든 사람을 회의장으로 불러 모으시오.
그 자리에서 구혼자들에게 분명하게 선언하시오.
이제 그대의 집에서 먹고 마시며 재산을 탕진하는 일을 그만두고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이오.
잔치를 벌이고 싶다면 자기 소와 양을 잡고, 자기 포도주를 마시게 하시오.
한 사람의 재산을 돌아가며 끝없이 축내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오.
그리고 그대의 어머니가 정말로 재혼하기를 원한다면, 친정인 이카리오스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 그러면 친정 식구들이 어머니의 신분에 어울리는 혼례를 마련하고, 사랑하는 딸에게 넉넉한 지참금도 준비해 줄 것이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소.
좋고 튼튼한 배 한 척을 마련하고, 믿을 만한 뱃사람 스무 명을 모으시오.
그리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직접 떠나시오.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제우스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대에게 진실을 알려 줄지도 모르오.”
아테네는 텔레마코스가 걸어가야 할 길을 하나씩 일러 주었다.
“먼저 필로스로 가서 늙은 왕 네스토르를 만나시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오디세우스와 함께 싸운 사람이니,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런 다음 스파르타로 가서 금발의 메넬라오스를 만나시오.
그는 트로이에서 돌아온 그리스 지휘관 가운데 가장 늦게 고향에 도착한 사람이오.
오랜 세월 여러 나라와 바다를 떠돌았으니, 그 여행길에서 오디세우스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수도 있소.
그대의 아버지가 살아 있으며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1년을 더 참고 기다리시오.
그러나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타케로 돌아와 그분을 기리는 무덤을 만들고 정성껏 장례를 치르시오.
아들이 지켜야 할 예를 다하고, 어머니에게도 새로운 남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드리시오.”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로 머물러서는 안 되오”
아테네의 목소리는 더욱 힘차게 울렸다.
“그 모든 일을 마친 뒤에는 그대의 집을 차지하고 있는 구혼자들을 어떻게 몰아낼 것인지 깊이 생각하시오.
지혜를 사용하든 힘을 쓰든, 이제 그대의 가문과 재산을 스스로 지켜야 하오.
그대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오.
어린아이처럼 망설이고 뒤로 물러설 나이는 이미 지났소.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소?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아이기스토스를 벌함으로써 온 세상에 이름을 떨쳤소. 사람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은 오레스테스를 지금도 칭송하고 있소.
텔레마코스여, 그대를 보니 몸도 훌륭하고 키도 늠름하오.
이제 그 몸에 어울리는 용기를 가지시오.
훗날 세상 사람들이 그대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칭송하게 하시오.
나는 이제 돌아가야겠소. 빠른 배와 동료들이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내가 일러 준 말을 잊지 마시오. 마음을 굳게 먹고, 그대가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해내시오.”
텔레마코스의 마음을 움직인 낯선 손님
텔레마코스는 자신을 걱정하는 손님의 진심에 깊이 감동했다.
“멘테스님, 저를 친아들처럼 생각해 주시며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들은 가르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먼 길을 오셨으니 조금 더 머물러 주십시오.
목욕으로 피로를 푸시고 마음 편히 쉬셨으면 합니다.
떠나실 때는 제가 정성껏 준비한 선물도 받아 주십시오.
오랫동안 간직하며 저를 기억하실 수 있는 귀한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가까운 벗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들었습니다.”
눈빛이 빛나는 아테네가 대답했다.
“아니오. 갈 길이 바쁘니 지금은 나를 붙잡지 마시오.
그대가 진심으로 선물을 주고 싶다면 내가 다시 돌아오는 날 건네주시오.
그때 귀한 것을 골라 준다면 나도 그에 어울리는 선물로 보답하겠소.”
말을 마친 아테네는 한 마리 새처럼 높이 날아올라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는 떠나면서 텔레마코스의 가슴에 힘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희미해져 가던 아버지의 기억도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되살려 놓았다.
텔레마코스는 방금 전까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께서 나를 찾아오셨다.’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솟아오른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용기였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한숨짓던 소년은 그 자리에 없었다.
텔레마코스는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 구혼자들이 모여 있는 넓은 방으로 걸어갔다.
페미오스가 부르는 슬픈 귀향의 노래
궁전 안에서는 가객 페미오스가 수금을 타며 노래하고 있었다.
구혼자들도 떠들기를 멈추고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페미오스가 부르는 것은 트로이 전쟁을 마친 그리스군의 귀향 이야기였다.
아테네의 분노로 그리스 영웅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비참한 운명이 애절한 선율을 타고 궁전 안에 퍼졌다.
2층 방에 있던 페넬로페도 그 노랫소리를 들었다.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이 오래도록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남편의 기억을 흔들어 깨웠다.
페넬로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두 시녀가 뒤를 따랐다.
구혼자들이 모여 있는 넓은 방에 이르자 페넬로페는 얇은 베일로 두 뺨을 가렸다.
그리고 지붕을 받치고 있는 큰 기둥 곁에 멈춰 섰다.
충실한 두 시녀가 그녀의 양옆에 섰다.
페넬로페는 눈물을 흘리며 가객에게 말했다.
“페미오스여,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많은 노래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신과 영웅들의 위대한 행적을 노래한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겠지요.
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시며 조용히 들을 수 있도록 다른 노래를 불러 주십시오.
하지만 지금 부르는 이 노래만은 멈춰 주십시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제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픕니다.
저는 세상 누구보다 훌륭했던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낮에도 밤에도 저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스 전역에 이름을 떨쳤던 남편을 생각하면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어머니 앞에 자신의 뜻을 밝히다
그러자 텔레마코스가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어머니, 가객이 마음 가는 대로 노래하게 두십시오.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가객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기쁨과 슬픔을 내리는 것은 제우스입니다.
페미오스가 그리스인들의 비참한 귀향을 노래한다고 해서 그를 탓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을 담은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입니다.
트로이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아버지 한 분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그리스 영웅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또 많은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도 마음을 굳게 먹고 이 노래를 들어 주십시오.”
텔레마코스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어머니께서는 방으로 돌아가 베를 짜고 실을 잣는 일을 살펴 주십시오.
시녀들에게도 각자 맡은 일을 하도록 일러 주십시오.
이 집의 바깥일과 앞으로 내릴 결정은 제가 맡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집의 책임은 이제 저에게 있습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아들이 어머니에게 내린 말이 지나치게 강하고 권위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텔레마코스가 처음으로 구혼자들 앞에서 자신이 오디세우스 가문의 후계자임을 선언했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년으로 취급받던 그가 이제 집안의 운명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이다.편집자 보완 글)
페넬로페는 아들의 달라진 모습에 놀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던 아들의 입에서 이토록 신중하고 단호한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들의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다시 위층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 안에서 시녀들과 함께 사랑하는 남편 오디세우스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눈빛이 빛나는 아테네가 그녀의 젖은 눈 위에 달콤한 잠을 내려 줄 때까지,
페넬로페는 오래도록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구혼자들을 향한 첫 번째 경고
페넬로페가 방으로 돌아가자 구혼자들은 다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페넬로페와 결혼하여 이 궁전의 주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때 텔레마코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어머니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여러분, 지금은 음식을 드시고 노래를 들으십시오.
하지만 함부로 고함치거나 소란을 피우지는 마십시오.
훌륭한 가객의 노래를 조용히 듣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모두 회의장으로 나오십시오.
그 자리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이 집에서 나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앞으로 잔치를 벌이고 싶다면 자기 재산으로 음식을 마련하고, 서로의 집을 번갈아 찾아가며 먹고 마십시오.
그러나 계속해서 제 집에 머물며 한 사람의 재산을 거침없이 축내겠다면, 저는 영원한 신들에게 호소하겠습니다.
제우스께서 여러분의 행위에 합당한 대가를 내리시는 날, 여러분은 이 집 안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쓰러질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뜻밖의 말에 구혼자들은 크게 놀랐다.
그들은 입술을 깨물며 텔레마코스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조용히 앉아 자신들의 횡포를 지켜보기만 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안티노오스의 조롱
구혼자들의 우두머리인 에우페이테스의 아들 안티노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텔레마코스여, 신들이 자네에게 높은 목소리로 말하고 대담한 말을 쏟아 내는 법을 가르쳐 준 모양이군.
하지만 자네가 오디세우스의 아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타케의 왕이 되는 것은 아니네.
이타케의 왕위가 집안에서 아들에게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께서 자네를 이 섬의 왕으로 세우지 않으시기를 바라네.”
안티노오스의 말에는 노골적인 위협이 담겨 있었다.
그는 텔레마코스가 오디세우스의 뒤를 이어 이타케의 왕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텔레마코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안티노오스님, 제가 하는 말을 불쾌하게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우스께서 허락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이타케의 왕이 되겠습니다.
왕이 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왕이 되면 집안은 부유해지고 사람들의 존경과 명예도 얻게 됩니다.
그러니 왕의 자리가 하찮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이타케의 많은 유력자 가운데 누군가가 왕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누가 이타케의 왕이 되든, 적어도 이 집과 아버지가 제게 남겨 주신 재산과 하인들의 주인은 저입니다.”
에우뤼마코스가 떠보듯 묻다
이번에는 폴리보스의 아들 에우뤼마코스가 나섰다.
“텔레마코스여, 누가 이타케의 왕이 될지는 신들의 뜻에 달려 있네.
하지만 자네 집과 재산만큼은 자네가 계속 지켜야겠지.
자네 재산을 탐내 폭력으로 빼앗으려는 사람이 이타케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네.”
겉으로는 텔레마코스를 위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 속에는 왕권과 재산을 둘러싼 탐욕이 숨어 있었다.
에우뤼마코스가 물었다.
“그런데 조금 전 이 집을 찾아왔던 손님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다고 하던가?
고향과 가문은 어디이며, 어떤 집안의 사람인가?
혹시 자네 아버지에 관한 소식을 가져온 사람인가?
아니면 자기 볼일 때문에 이타케에 들른 것인가?
제대로 인사도 나누기 전에 너무 급히 떠나 버렸군.
겉모습을 보니 결코 평범하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 같지는 않던데.”
텔레마코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제 아버지의 귀환에 대해서는 거의 희망을 버렸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문도 믿지 않으며, 어머니께서 불러들이는 예언자의 말에도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조금 전 손님은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타포스의 왕 멘테스입니다.
현명한 안키알로스의 아들이며, 노를 잘 젓는 타포스 사람들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텔레마코스는 구혼자들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와 용기를 불어넣고 새처럼 사라진 그 손님이 평범한 인간일 리 없었다.
그는 불사의 신, 지혜의 여신 아테네였다.
잠들지 못하는 밤
구혼자들은 밤늦도록 춤을 추고 노래를 들으며 즐겼다.
어둠이 짙어지자 그들은 저마다 잠을 자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텔레마코스도 궁전 뜰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의 침실로 향했다.
그 방은 사방이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곳이었다.
늙은 유모 에우뤼클레이아가 두 손에 횃불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에우뤼클레이아는 페이세노르의 아들 옵스의 딸이었다.
오래전 라에르테스가 젊은 에우뤼클레이아를 소 스무 마리의 값으로 사들였다.
라에르테스는 그녀를 아내처럼 존중하고 아꼈지만, 아내 안티클레이아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잠자리를 함께하지는 않았다.
에우뤼클레이아는 텔레마코스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정성껏 키웠다.
어머니 페넬로페 못지않게 텔레마코스를 사랑했고, 텔레마코스도 궁전의 다른 하녀들보다 그녀를 깊이 믿고 따랐다.
에우뤼클레이아는 횃불로 방 안을 밝힌 뒤 텔레마코스가 입고 있던 옷을 받아 곱게 접었다.
옷을 벽의 나무못에 걸고 방문을 닫은 뒤, 손잡이에 가죽끈을 걸어 문을 단단히 잠갔다.
텔레마코스는 양털 담요를 덮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앞에는 아테네가 일러 준 길이 끝없이 펼쳐졌다.
필로스의 늙은 왕 네스토르, 머나먼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 한 번도 건너 본 적 없는 어두운 바다, 그리고 그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 오디세우스.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이 그의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찾고 자신의 집을 되찾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날 밤, 텔레마코스는 더 이상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소년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찾아 스스로 바다로 나가려는 한 사람의 젊은 영웅이었다.
제2회의 핵심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행’이라면 텔레마코스의 모험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여행’이다.
아테네는 텔레마코스에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고, 첫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심어 준다.
결국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누군가의 보호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두려움 속에서도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힘이다.
텔레마코스는 아직 배를 띄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항해는 이미 마음속에서 시작되었다.
다음 3회 예고
제3회|이타케의 민회, 구혼자들의 횡포를 고발하다
다음 날 아침, 텔레마코스는 이타케 사람들을 회의장으로 불러 모은다.
오디세우스가 떠난 뒤 처음 열리는 민회다.
아버지의 홀을 손에 들고 사람들 앞에 선 텔레마코스는 구혼자들이 자신의 집과 재산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 눈물로 호소한다.
그러나 구혼자들은 오히려 모든 책임을 페넬로페에게 돌리며 그녀가 꾸민 ‘수의의 계략’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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